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합스부르크 가문 (문단 편집) === 중흥기 ===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흥은 18세기에 찾아왔다. 1683년 [[오스만 제국군]]이 대규모로 침공해와 [[제2차 빈 공방전]]이 벌어졌으나 [[레오폴트 1세]]는 독일의 영방 제후들과 [[폴란드-리투아니아 연방]]을 우군으로 끌어들여 [[빈(오스트리아)|빈]]을 성공적으로 방어해 낸 후 퇴각하는 오스만 제국군을 곧장 추격하여 [[대튀르크 전쟁]]을 일으켰다. [[사부아 공자 외젠]]의 맹활약으로 [[카를로비츠 조약]]을 통해 [[오스만 헝가리]]와 [[트란실바니아 공국]]을 탈환했고 이후 [[파사로비츠 조약]]으로 [[동유럽]]을 잠식해 들어갔다. 대튀르크 전쟁으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후에도 19세기까지 오스만 제국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을 통해 동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제2차 빈 공방전에서 도움을 준 폴란드-리투아니아를 [[폴란드 분할|분할]]해 냠냠하기도 했다. 한편 [[압스부르고 왕조|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]]의 [[카를로스 2세]]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를 두고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이 서로 왕위를 주장하며 [[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]](1701년~1714년)이 일어났다. 13년에 걸친 전쟁 끝에 부르봉 가문은 스페인 왕위를 따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프랑스와 스페인을 영원히 합칠 수 없었다.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는 과거 한때 스페인령이었던 [[밀라노 공국]]과 [[나폴리 왕국]], [[시칠리아 왕국]] 등의 이탈리아 영토와 [[스페인령 네덜란드]]를 획득했다. 반면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는 이후 [[프랑스 혁명]]으로 이어지는 1세기간의 길고 느린 쇠퇴 국면에 접어들었다. [[대튀르크 전쟁]]의 후속전으로 치뤄진 제6차 오스트리아-튀르크 전쟁(1716년 ~ 1718년)에서도 오스만 제국에 승리를 거두어 [[합스부르크 세르비아|세르비아]]와 [[보스니아]] 북부 등을 획득했다. 합스부르크 가문은 이렇게 18세기 전반기에 다시 중흥을 맞이하게 되었만 얘기치 못한 것에서 위기가 찾아왔다. 상기된 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[[카를 6세]]가 아들을 낳지 못하여 가문이 단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. 카를 6세는 [[살리카 법]]에 위배됨에도 불구하고 딸인 [[마리아 테레지아]]에게 가문을 물려주기 위해 [[국사조칙]]을 공표했다. 그러나 본디 계승 서열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보다 우위에 있었던 형 [[요제프 1세]]의 딸들과 사위들의 존재 때문에 카를 6세는 주변국에게 많은 이권을 떼주거나 영토를 양보해야 했다.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이 프랑스와 접하고 있던 로트링겐(로렌)의 공작 [[프란츠 1세|프랑수아 에티엔]]이었기 때문에 특히 프랑스 국왕 [[루이 15세]]의 반발이 심했고, 결국 카를 6세는 1736년 [[로트링겐 공국]]을 [[신성 로마 제국]]에서 분리시켜 프랑스로 넘겨주었다. 또 1734년 일어난 [[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]]의 결과 체결된 빈 조약(1738년)에서 카를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위해 주변국들에게 상당 부분을 양보했고 그 결과 [[토스카나 대공국]]과 [[파르마 공국]]을 획득하는 대신 [[나폴리 왕국]]과 [[시칠리아 왕국]]을 내주었다. [[카를 6세]]가 이렇게 여러 조치를 취해 두었지만, 그가 사망하자 [[프로이센 왕국]] 등 주변 여러 세력들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합스부르크 계승을 반대하며 달려들면서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이 발발했다. 그 결과 [[바이에른 선제후국|바이에른]] [[선제후]]이자 요제프 1세의 사위인 [[비텔스바흐 가문]]의 카를 알브레히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[[카를 7세]]로 선출되었다. 그러나 카를 7세가 오래지 않아 사망하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[[프란츠 1세]]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.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이후 왕조는 정식으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왕조라 칭했지만,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합스부르크 가문이라고 불렀다. 로렌, 즉 로트링겐을 프랑스에게 줘버렸으니, 합스부르크로트링겐이라고 부를 때마다 로트링겐 없는 로트링겐 가문이라는 조롱과 로트링겐을 되찾자! 하는 호전적 발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. 한편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의 결과 알짜배기 땅이던 [[실레시아|슐레지엔]]을 신흥세력 프로이센에게 빼앗기고 말았다.[*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[[파르마 공국]]도 [[보르본 왕조|스페인 부르봉 왕조]]에게 빼앗겼으나 이곳을 잃은 타격은 슐레지엔에 비해 크지 않았다.] 이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기 위해 [[동맹의 역전]]이라는 초강수까지 동원하여 노력하였으나 [[7년 전쟁]]에서 패배하여 독일 내에서의 패권을 잃었다.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치세 동안에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등 반항적이었던 영지를 평정하고 북쪽의 [[폴란드-리투아니아]]를 프로이센, 러시아와 함께 [[폴란드 분할|분할, 획득]]하였다.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[[프랑스 혁명]]이 터지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다시 위기에 직면했다. 합스부르크 가문은 [[마리 앙투아네트]]를 구실로 혁명 전파를 두려워한 여러 왕정 국가들과 같이 대프랑스 전쟁을 일으켰으나, [[대육군|혁명 프랑스군]]의 놀라운 전투력과 때마침 등장한 [[나폴레옹 보나파르트]]에게 탈탈 털리고 [[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|벨기에]]와 이탈리아마저 뺏겨버렸다. 나폴레옹이 [[프랑스 제1제국|황제로 등극하자]] 위기에 처한 [[프란츠 2세]]는 그동안 [[동군연합]] 상태를 유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하나로 통합하여 [[오스트리아 제국]]을 세우고 영국, 러시아, 프로이센과 손잡으며 [[오스트리아 전쟁|공동 전선을 결성했으나]] 치명타를 입고 1806년에는 [[신성 로마 제국]] 자체가 와해당했다. 이어지는 [[제2차 오스트리아 전쟁]]까지 깨지면서 유일한 해안 지역인 [[달마티아]]를 뺏기고 프란츠 2세의 장녀 [[마리 루이즈]]를 강제로 나폴레옹에게 시집을 보내는 등 굴욕을 맛보던 시기, 나폴레옹이 극적으로 [[러시아 원정]]을 거쳐 몰락하면서 상황은 또 반전된다. 재반격에 나서 프랑스를 핀치로 몰아붙인 합스부르크 가문은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[[빈 회의]]에서 잃었던 영토의 상당수를 회복하고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인 [[독일 연방]]의 의장국이자 [[빈 체제]]를 주도하였다. 이후 [[내셔널리즘|민족주의]]의 물결이 유럽을 뒤덮으며, [[독일 통일]]에 대한 열망이 높아지게 되었고 아울러 그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보호자로 여겼던 제국 내의 다양한 민족들이 민족의식에 대해 눈 뜨기 시작했다.[* 오스만 제국이 슬슬 망조가 보이니 필요 없어진 합스부르크를 손절하기 시작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.] 이러한 민족주의의 물결 속에서도 오스트리아 제국은 한동안 버텼으나 1866년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[[프로이센-오스트리아 전쟁|보오전쟁]]에서 [[프로이센 왕국]]에게 패하고 말았다. 그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강의 나라였던 오스트리아의 위신은 무너졌으며, 통일 독일에서 강제로 배제되었다.[*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는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한 대독일 연방을 결성하길 원했지만,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굴욕적인 통일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반대했다. 즉 누가 독일 통일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주체인가는 보는 시각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있다.] 게다가 비슷한 시기에 [[이탈리아 통일|이탈리아 통일운동]]의 결과로 [[사르데냐 왕국|사르데냐-피에몬테 왕국]]에게 [[롬바르디아]]에 이어 [[베네토]] 지역을 상실하고, 분가가 통치하던 [[토스카나 대공국]]과 [[모데나 레조 공국]]도 멸망하면서[* 모데나 공작가는 마지막 공작 프란체스코 5세가 사망한 후 남계가 단절되었고, 토스카나 대공가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.] [[이탈리아 반도]]에서의 영향력도 사실상 상실했다. 뿐만 아니라 패배의 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고, 이에 [[프란츠 요제프 1세]]는 제국 내에서 [[독일인]] 다음으로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[[헝가리인]]들과 [[대타협|타협하여]] 새로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이 출범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